확률적으로는 1/4이다. 2011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K리그 팀들끼리 붙을 확률 말이다. 전북현대와 수원블루윙즈는 오늘(26일) 각각 알 이티하드와 알 사드를 상대로 운명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을 치른다. 경기 결과에 따라 K리그 팀끼리 결승전을 치르는 가슴 벅찬 순간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2년 연속 아시아 정상을 차지했고 지난 해에는 동아시아 8강 티켓 넉 장 모두를, 올 시즌에는 넉 장의 티켓 중 석 장을 휩쓴 것만으로도 K리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K리그 팀끼리 결승전에서 격돌하는 건 가슴 벅찬 감동을 넘어 경이로운 순간이 될 것이다.

29차례 결승전에서 ‘딱 두 번’

AFC챔피언스리그라는 대회는 얼핏 보면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2002/03 시즌부터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고 최근 들어서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운영 방식을 따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대회의 역사는 꽤 오래 됐다. 1967년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라는 명칭으로 처음 개최된 뒤 1985년에는 각국 리그 우승 팀이 참가하는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2년부터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과 각국 FA컵 우승 팀들이 참가하던 아시안 컵 위너스컵이 통합돼 AFC챔피언스리그로 발전해 지금에 이르렀다.

역사를 살펴보면 무려 44년이 이르는 대회다. 1972년부터 1984년까지 12년 동안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과거에는 이스라엘까지 참가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대회였다. 1967년 첫 대회에서 이스라엘 하포엘 텔 아비브가 우승한 뒤 지금까지 29번의 우승팀이 나왔는데 한국이 9회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이 5회, 사우디아라비아가 4회, 이란과 이스라엘이 3회씩 우승을 경험했다. 클럽별로는 포항스틸러스가 3회 우승으로 가장 많은 우승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 열린 29차례의 결승전 중에서 같은 국가 팀이 결승에서 맞붙은 게 딱 두 번인데 이게 모두 K리그 팀들 간의 대결이었다는 점이다.

1997년 포항과 일화가 결승전에서 만나 포항이 2-1로 승리를 챙겼고 2002년에는 수원과 안양이 결승에서 격돌해 0-0 무승부에 이은 승부차기 끝에 수원이 안양을 제압하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나머지 27차례의 결승전에서는 우승컵을 놓고 한 국가의 두 프로 팀이 대결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 프로팀이 네 번의 대회 중 세 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던 1960년대에도 이뤄내지 못한 일을 춘추전국시대인 1990년 이후 K리그만이 해냈다. 심지어 K리그는 정규리그 일정과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일정이 겹친다는 이유로 1993년까지 불참한 적도 많았으니 더 대단한 성과다.

잇몸으로 버틴 일화의 결승행

1997년 당시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은 추춘제로 열렸다. 쉽게 말해 1996년 가을부터 대회를 치러 결승전이 1997년 3월에 열리는 방식이었다. 1996년 전력이 그대로 1997년 대회 성적으로 나오는 셈이다. 1995/96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천안일화와 1995년 한국 프로축구 준우승팀 포항아톰즈는 1996/97대회에서 동부지역 예선을 통과해 4강에 안착했다. 4강전부터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이 열려 잘 알려진 제3지역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샤알람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일화와 포항은 말레이시아로 날아갔다.

일화는 준결승에서 이라크의 자우라와 격돌했다. 1996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과 아시아-아프리카 대항전, 아시아 슈퍼컵까지 석권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일화는 전년도에 비해 전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고정운이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진출했고 박남열과 이영진, 한정국은 군대에 갔다. 이상윤과 이기범은 임의탈퇴 신분이었다. 박종환 감독 이후 사령탑을 맡았던 이장수 감독이 정규리그에서의 부진으로 경질되고 레네 감독이 새로 부임해 아직 선수단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시기였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일화보다는 자우라가 앞서 보였다.

하지만 일화는 자우라를 상대로 이태홍과 황연석 등 젊은 선수들을 기용해 경기를 주도했고 신태용도 펄펄 날았다. 그리고 전반 41분 천금 같은 결승골이 터졌다. 신태용의 패스를 이어받은 황연석이 머리를 이용해 공을 떨궜고 이를 김창원이 침착하게 골로 연결한 것이었다. 이 경기에서 신태용은 중원을 진두지휘하면서 젊은 선수들을 독려했고 결국 경기 MVP에 선정됐다. 일화는 전년도에 비해 약해진 전력으로도 또 다시 결승전에 오르면서 대회 2년 연속 우승을 노릴 수 있게 됐다. 전년도 그랜드슬램 달성 후 “일화 선수들이 마치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면서 해외 언론이 붙인 ‘코리안 머신’이라는 별명은 선수들이 바뀐 뒤에도 유효했다.

‘한국의 시대’가 열렸다

이 경기가 끝난 뒤 포항은 이란의 피루지(지금의 페르세폴리스)와 준결승을 치렀다. 당시 피루지에는 코다다드 아지지와 카림 바게리 등 쟁쟁한 이란 현직 국가대표 선수가 즐비했다. 전문가들도 피루지를 우승후보 1순위로 꼽았다. 반면 포항은 라데가 J리그로 떠났고 황선홍은 부상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그나마 홍명보와 일화에서 영입한 안익수가 버틴 수비진이 강점이었지만 공격진의 파괴력은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특히 공격을 책임지던 라데의 이적은 포항으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일방적인 포항의 공격이 이어졌다. 바게리는 홍명보와 안익수의 수비에 완벽히 막히고 말았다. 결국 포항은 박태하가 두 골을 기록했고 상대 자책골까지 묶어 피루지에 3-1 완승을 챙겼다. 피루지는 0-3으로 뒤진 상황에서 아지지가 후반 종료 직전 가까스로 영패를 면하는 골을 기록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라데가 떠난 빈자리를 완벽히 채운 박태하의 플레이가 돋보이는 경기였다. 이렇게 일화와 포항이 결승에 진출해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역사상 한 국가 클럽이 결승전에서 만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두고 해외 언론에서는 ‘한국의 시대(Korea Dynasty)’라면서 경악했다. 말레이시아에서 한국 프로축구 팀끼리 결승전을 치르는 상황이 벌어지자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이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려 날아갔다. 정몽준 회장이 경기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은 ‘한국의 시대’를 제대로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말레이시아 축구장은 한국의 축구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1995년 프로축구 챔피언결정전에서 명승부를 연출했던 두 팀은 아시아 정상 무대에서 또 다시 맞붙었다.

아시아 점령한 2002년의 K리그

2001/02 대회에서는 수원과 안양이 일을 냈다. 대회 방식 변경으로 제주도에서 열린 동부지역 4강전 풀리그에서 단 두 팀만이 최종 4강전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다롄 스더와 가시마 앤틀러스가 수원, 안양과 함께 풀리그로 경기를 치러야 해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수원과 안양 두 팀 중 한 팀도 서아시아와 겨루는 최종 4강전에 못 나갈 수도 있었다. 첫 경기에서 수원과 안양은 득점 없이 0-0으로 비겼고 이후 수원은 가시마와 다롄을 각각 2-0으로 완파하고 2승 1무로 풀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다롄전에서는 산드로가 두 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선보였다. 전년도 대회 우승팀 수원의 2관왕 꿈이 무르익었다.

문제는 안양이었다. 수원과의 첫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안양은 다롄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훗날 제주유나이티드에서 잠시 뛴 옌쑹에게 먼저 한 골을 허용하면서 끌려갔다. 1무 1패라는 성적은 사실상 탈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후반 종료 5분을 남기고 왕정현이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가까스로 1-1 무승부에 성공했다. 그리고 가시마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또 다시 후반 9분 선취골을 내주면서 탈락 위기에 놓였다. 가시마는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수원과 함께 최종 4강전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반 종료 직전 안양 안드레는 마지막 프리킥 기회에서 통렬한 골을 성공시키면서 안양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결국 3무승부로 안양이 수원에 이어 풀리그 2위를 차지해 최종 4강전에 나갈 수 있었다.

4강전은 K리그 팀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란 테헤란에서 치러져 서아시아 팀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한국에서는 아디다스컵이 시작된 상황이어서 4강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모든 조건이 K리그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상황이었다. 산드로가 경고누적으로 결장했고 데니스는 허벅지 부상으로 아예 이란에 가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 수원의 4강 상대는 우즈베키스탄 팀 나사프 카르시였다. 신흥 명문인 나사프 카르시는 서아시아 4강전에서 알 와다(UAE)를 2-1로 제압하면서 돌풍을 일으킨 팀이었다. 실제로 수원은 전반전을 0-0으로 마치면서 고전했다.

하지만 후반 들어서 경기력이 달라졌다. 알렌과 서정원, 이선우가 연속골을 이어가며 후반에만 세 골을 뽑아내고 3-0 완승을 챙겼다. 특히 산드로의 결장으로 대신 기회를 잡은 알렌은 이날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면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후반 들어 폭우로 경기가 20분간이나 중단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원은 어렵지 않게 승리를 챙겼다. 나사프 카르시는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돌풍이 여기에서 멈췄다. 특히 4년 동안 우즈베키스탄 정규리그에서 무려 70골을 뽑아낸 공격수 자파 콜모라도프는 제대로 된 슈팅 한 번 때리지 못했다. 수원은 결승에 안착해 다른 준결승전을 지켜봤다.

안양을 구한 안드레의 한 방

안양은 동아시아 4강전보다 더 힘든 상황을 맞았다. 홈팀 에스테그랄과 맞붙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에스테그랄은 서아시아 2라운드에서 ‘최강’ 알 이티하드(사우디)와 1승 1패를 주고 받은 끝에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서아시아 4강에 오른 팀이었다. 알 이티하드와의 원정에서 2-3으로 패한 뒤 안방에서 열린 2차전에서 2-1 승리를 따냈다. 서아시아 4강전 세 경기에서도 9골을 기록하며 2승 1무로 풀리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공격력이 막강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에스테그랄의 어렵지 않은 승리를 점쳤다. 에스테그랄은 이란에서 페르세폴리스와 양강 구도를 형성하는 강팀이었다.

대표팀 해외 전지훈련에 참가하고 있던 이영표와 최태욱이 곧바로 이란으로 합류했지만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반면 에스테그랄은 이란 대표가 무려 7명이나 포함됐다. 전반을 0-0으로 마친 안양은 후반 10분 코너킥 상황에서 마르코가 선제골을 기록해 1-0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에스테그랄은 6분 뒤 곧바로 동점에 성공했다. 홈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에스테그랄은 이후 줄곧 안양을 몰아쳤다. 하지만 후반 27분 이미 동아시아 4강전에서 팀을 극적으로 구해냈던 안드레가 일을 냈다. 안드레는 천금 같은 결승골을 뽑아내며 안양의 2-1 승리에 일등공신이 됐다.

결국 결승전은 수원과 안양의 맞대결로 펼쳐졌다. 대회 사상 두 번째로 한 국가의 두 프로 팀이 결승전을 치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K리그 최고의 라이벌전이 이란 땅에서 펼쳐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당시 한 이란 언론에서는 “이란 축구의 치욕”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K리그 두 팀의 결승전을 부러워했다. 이란 구단의 우승을 위해 야심차게 결승전을 유치했지만 결국 한국에서 날아온 두 팀의 무대에 멍석만 깔아주는 꼴이 됐기 때문이다. 이란 축구의 성지라 불리는 아자디 스타디움은 K리그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전북과 수원, 세 번째 역사를 이루자

오늘은 운명의 날이다. 전북과 수원이 세 번째 역사를 장식할 수 있을지 그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만약 오늘 전북과 수원이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면 아시아 그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일을 K리그가 세 번씩이나 달성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일본은 J리그 구단이 결승에 오를 것에 대비해 결승전을 유치했지만 결국 K리그 구단의 우승 세레모니를 안방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올해 대회부터는 결승전에 진출한 한 팀의 홈에서 경기가 열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한국 땅에서 K리그 두 구단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른다면 아마 이는 아시아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될 것이다.

전북이라고 방심하기에도, 수원이라고 낙담하기에도 이르다. 알 이티하드는 2004년 홈에서 성남에 1-3으로 패한 뒤 적지에서 5-0 대승을 거두고 기적적인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2006년에는 전북이 8강과 4강에서 1차전을 지고도 2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에 성공하며 우승했었다. 1차전을 잘 치렀다고 해서 여유를 부리기에도 이르고 1차전을 패했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도 이르다. 전북과 수원은 오늘 끝까지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두 팀 모두 결승에 진출하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K리그가 아시아에서 가장 멋진 축구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면 좋겠다.

선배들은 좋지 않은 여건에서도 기적을 연출하면서 두 번이나 아시아 축구를 놀라게 했다. 돈이 남아 돌아 전세기 타고 경기하러 다니는 중동 클럽도 못했고 AFC에서 왕 노릇하는 일본 클럽도 못한 걸 K리그만 해냈다. 오늘 경기에 나서는 전북과 수원 선수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7년 한 외국 언론이 말한 ‘한국의 시대’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실력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전주성에서 전북과 수원이 아시아 전체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결승전을 치르길 기대한다. ‘한국의 시대’가 쭉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아 전체에 다시 한 번 퍼뜨려 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