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조광래 감독이 지금은 대표팀에서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K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 받았었다. 1년 사이 조광래 감독은 최고의 명장에서 아시아 2류 팀에도 간신히 승리를 거두는 비판의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왜 그런 걸까. 1년 전 조광래 감독이 경남에서 보여준 믿기지 않는 경기력의 원인을 찾아본다면 지금 대표팀도 더 멋진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현 대표팀의 경기력을 비판할 게 아니라 지난해 경남과 지금 대표팀의 차이를 비교하는 게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이다.

경남, ‘짐승 축구’의 원동력은?
지난해 경남은 기적적인 돌풍을 일으켰었다. 현직 대표선수가 한 명도 없었고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도 2~3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철저한 무명이었다. 그런데 경남은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4월 말에는 구단 창단 이래 처음으로 리그 1위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경남은 상대가 어느 팀이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저력을 선보였었다. 선수 몸값만 수십억 원에 1년 구단 운영비만해도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빅클럽들도 경남 앞에서는 마치 가수 지나 앞에서 몸매를 자랑하다 망신 당하는 꼴이 됐다.

당시 경남 선수들은 “개처럼 뛰었다”고 했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그라운드에서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한 선수는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 그라운드에 서 있을 힘이 없어야 만족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광래 감독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상대라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경남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광래 감독은 선수들의 심리를 완벽히 파악하고 조련했다. 한 선수는 “조광래 감독이 계속 경남에 남아 있었다면 K리그 우승도 꿈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경남은 가까스로 프로의 문턱에 입성한 어린 선수들이 즐비했다. 연봉도 프로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은 이들이었다. 2~3천만 원을 받으면서도 이들은 프로 무대에 입성한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했고 축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걸 감사해했다. 조광래 감독은 이 점을 활용했다. 훈련은 실전처럼 격렬했고 이들 중 선택받은 이들은 꿈에 그리던 K리그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이런 간절함을 가진 선수가 그라운드에 11명이나 있으니 제 아무리 최고의 기량을 가진 상대라도 겁날 게 없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경남 선수는 이렇게 회상했다. “경기에 나서 어슬렁어슬렁 대다가는 언제 또 다음 경기에 나설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죽기 살기로 뛸 수밖에 없었죠.” 조광래 감독이 경기 도중 벤치에서 “뛰라. 마”라고 외치면 그들은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 다녔다.

조광래 유치원?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계
이때 발굴된 선수들이 이용래와 김태욱, 김주영 등이다. 이들은 이미 K리그에 입성하기 전부터 부상이나 축구에 회의감이 들어 한 차례씩 좌절했던 선수들이었다. 윤빛가람 역시 청소년 대표 시절 주목받다가 잊혀진 선수였다. 조광래 감독은 어린 선수들에게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이제 막 K리그에 입성해 군기가 바짝 든 선수들은 조광래 감독이 한 마디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만큼 플레이 스타일은 전투적이었다. 개인 기량은 다른 팀에 비해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엄청난 활동량으로 이를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아 상대를 압도했다. 압박하고 또 압박하고 또 압박했다.

흔히 말하는 ‘건방’을 떠는 선수는 기회가 박탈되는 분위기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선수들은 박봉에 시달렸지만 스스로의 간절함과 조광래 감독의 심리전을 통해 ‘투사’로 변신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조광래 감독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뛴 결과는 구단 창단 역사상 처음 리그 1위라는 결과를 낳았다. 스타가 즐비한 빅클럽들이 순위표에서 경남 밑에 자리하는 진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당시 경남은 ‘조광래 유치원’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생존 경쟁이 펼쳐지는 살벌한 곳이었다. 두텁지 못한 선수층 탓에 베스트11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고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베스트11에서 밀리는 걸 두려워했다.

조광래 감독의 심리전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이후에도 나타난다. 경남과 대표팀 감독 겸업을 원했던 조광래 감독은 대한축구협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대표팀을 선택하면서 경남을 떠났다. 그리고는 조광래 감독을 보좌하던 김귀화 수석코치가 감독대행 자리에 앉았다. 조광래 감독 시절과 똑같은 전술, 똑같은 선수 구성으로 시즌에 임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몇 달 만에 경남은 다시 추락했다.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짐승처럼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김귀화 감독대행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조광래 감독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의미다. 한 선수는 “동기부여가 전혀 되질 않았다”고 회상했다.

대표팀에 필요한 동기부여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와 보자. 기량은 지난해 경남에 비해 월등한 선수들이 모였다. 하지만 그들은 1년 전 경남 선수들의 표현을 빌려 ‘개처럼’ 뛰지 않는다. 조광래 감독은 경남 시절처럼 어린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을 꾸렸지만 이들은 지난해 경남 선수들처럼 간절함이 없다. K리그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뛰고 싶다던 지난해 경남 선수들에 비해 이미 너무 많은 경기를 뛰었다. 2~3천만 원을 받고 뛰던 지난해 경남 선수들에 비해 1년에 100배는 돈을 더 번다. 당연히 간절함이 없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경남 선수들과 대표팀 선수들은 어리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속된 말로 대표팀 선수들은 머리가 너무 컸다.

현 대표 선수들이 나태해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이는 당연한 결과다. 나는 그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나 같아도 2천만 원 받다가 20억 원 받으면 태도부터가 달라질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조광래 감독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벤치에서 “뛰라. 마”를 외치지만 선수들의 반응은 지난해 경남과 다르다. 경남과 대표팀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경남 선수들은 지난해 “이렇게 짐승처럼 안 뛰면 감독님한테 죽어요”라고 했지만 대표팀에서도 이게 통용될 수는 없다. 조광래 감독은 지금 대표팀 심리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조광래 감독은 지난해 경남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이런 심리전을 비슷하게 적용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경남 선수들이 생존을 위해 뛰었다면 대표팀 선수들에게는 명예를 위해 뛰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에는 피 말리는 주전 경쟁이 답이다. 박지성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대충 뛰면 벤치 신세’라는 철학이 필요하다. 이미 간절함이 보여준 믿기지 않는 능력은 지난해 경남에서 입증됐다. 이 간절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서정진의 등장이 시사하는 것
나는 조광래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 명단을 눈 감고도 뽑을 수 있다. 항상 그 선수가 그 선수다. 선발 명단은 더 명확하다. 박주영과 지동원이 최전방에 포함될 것이고 구자철, 이용래, 기성용도 붙박이다. 수비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는 않다. 이들은 이번 경기에서 못 해도 다음 경기를 잘하면 된다. “이 한 경기 못하면 언제 또 기회를 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독기를 품고 짐승처럼 뛰어 다니는 게 조광래 감독의 축구였고 협회에서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대표팀 감독직을 맡겼다. 그런데 현 대표팀에는 독기도 없고 주전 경쟁도 없고 개인 기량만 있다.

서정진의 등장이 시사하는 바도 같은 맥락이다. 서정진은 대표팀에 데뷔해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도움 두 개를 기록했다. UAE전에서도 기가 막힌 패스로 박주영에게 골을 선물했다. 공격 포인트뿐 아니라 지난 UAE전에서 가장 열심히 뛴 것도 서정진이었다. 서정진은 간절했다. 대표팀에 처음 들어와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다시는 대표팀에 들어오지 못할 선수였다. 후반 막판 15분을 뛴 이동국이 이미 승패가 갈린 상황에서도 죽어라 좌우로 벌리고 크로스를 올리고 문전 쇄도한 것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조광래 감독이 경남에서 했던 그 심리전이 대표팀에서는 서정진과 이동국에만 영향을 끼쳤다.

소속팀 전북에서도 로테이션으로 등장하는 서정진이 대표팀에서 단숨에 주전으로 도약한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장담하는데 만약 서정진이 대표팀에 익숙해지고 붙박이 주전이 된다면 최근 두 경기에서 보여준 경기력을 절대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서정진의 능력을 낮게 평가해서가 아니다. 서정진이 “나는 대표팀의 붙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간절함이 사라진다. 이때부터는 그냥 다른 대표팀 선수들과 다를 게 없어진다. 왜 그가 최근 두 경기에서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뛰었는지 잘 생각해 보자. A매치 데뷔 시기에 비해 대표팀에서의 강렬함이 덜해진 손흥민도 같은 맥락이다.

조광래 감독, 선수들에게 ‘밀당’을 하라
누구도 주전이 보장되어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 뛰고 있다 할지라도 그게 주전을 보장해줘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 다 빼고 지금 K리그에서 대표팀 경기 보며 “나에게도 한 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을 힘을 다해 뛰겠다”고 하는 수준급 선수들만 모아 놨어도 UAE전은 더 통쾌하게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한 선수는 “내가 만약 대표팀에 간다면 나올 때는 파주에서 기어 나올 정도로 한 번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다. 현재 대표팀 베스트11 선수들이 다른 선수들과의 기량 차이가 현격한 것도 아닌데 왜 꼭 그들만을 고집해야 하나. 조광래 감독은 선수들 머리 꼭대기에서 심리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밀당’이 필요하다.

언론에서는 ‘플랜A’와 ‘플랜B’를 만들라고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박주영이 부상을 당하거나 컨디션 난조에도 빠지는 날에는 대표팀 공격 전체가 무너진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공격 옵션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박주영을 ‘플랜A’로, 다른 공격수를 ‘플랜B’로 칭하는 건 반대다. 박주영이 언제나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다른 공격 옵션 두 가지일 뿐이다. 조광래 감독의 머리 속에는 우선 순위가 있을지라도 그게 ‘A’인지 ‘B’인지는 자기만 알고 있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폴란드와의 첫 경기 아침이 돼서야 김병지와 경쟁하던 이운재에게 선발 통보를 내렸었다. 천하의(?) 홍명보와 안정환도 대표팀에서 제외된 적이 있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중인 상황에서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는 게 부담일 수는 있다. 하지만 현 대표팀 내에서도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몸만 풀다 소속팀으로 돌아가는 선수를 활용하는 건 그리 큰 모험은 아니다. 또한 새로운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이건 주전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기존 선수들 긴장하라고 취하는 ‘액션’도 아니다. 서정진처럼 당장 대표팀에 들어와 팀의 승리를 이끌 수 있는 선수들이 무척 많다. ‘짐승처럼’ 뛸 수 있는 선수들이 늘어난다면 월드컵으로 향하는 길도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이걸 무슨 기존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쓰자는 말이 아니다.

대표팀, 경남 축구를 해야 한다
현대 축구는 전술 싸움이라고 한다. 최근 대표팀의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력에 대해서도 전술 부재를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대표팀 전술에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포메이션 숫자 놀음이나 측면 수비의 보완 같은 건 지금 이 단계에서 논할 때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1980년대에나 나올 법한 촌스럽고 상투적인 단어, 바로 정신력이다. 제 아무리 전술을 잘 짠다고 해도 동기부여가 안 된 선수들로는 만족할 만한 경기를 할 수 없다. 정신력으로 축구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하는 전문가들도 많지만 나는 정신력으로 기적을 연출한 지난해 경남의 신화를 여전히 기억한다.

차두리는 어제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묘하게 오늘 쓰는 칼럼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나는 2002년 어쩜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역사를 함께 하고 난 뒤 대표팀에 뽑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대표팀에 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표팀을 멀리서만 바라봐야 했다. 실력도 안됐고 여러 가지로 깊은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이후 나는 대표팀에 3년 만에 합류 했다. 어쩜 나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 일거라는 생각에 나는 절박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대표팀에 남고 싶다고 하는 절박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보여주려고 했다.”

주축 선수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면 몇 경기는 아예 쉬게 만들어야 한다.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나서지 못하면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주전 경쟁은 치열해지고 서정진처럼 혜성처럼 등장하는 선수들이 생겨난다. 그래야 기존 선수도 더 긴장하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는 신예도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대표팀 전체가 강해지는 길이다. 지금과 같이 경쟁 없는 대표팀은 우리가 처음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때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조광래 감독은 항상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축구의 교과서’ 바르셀로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기적의 팀’인 지난해 경남을 바라봐야 한다. 지난해 경남을 만든 건 조광래 감독 본인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