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귀던 여자친구와 매일 싸우다가 헤어져도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만 기억에 남는다. 하루에 세 번씩 싸우던 그녀와 헤어진 게 처음에는 후련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상처는 잊혀진다. 남자는 참 머리가 나쁘다. 대신 그녀와 함께 다녔던 맛집과 여행지, 놀이공원에서의 추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꼭 우리는 그녀를 잊은 뒤 후회한다. 특히 내가 힘든 시기에 처했을 때는 이런 아련한 기억이 더욱 선명해 진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당돌한 20대 이천수, 그가 생각나는 이유
이천수(오미야)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심정이 이런 것 같다. 여전히 대표팀에서 그의 활약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당돌한 20대 초반에 이탈리아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말디니의 머리통을 후려치던 이천수의 패기가 다시 보고 싶다. 그의 톡톡 튀는 행동과 거침없는 언변도 그립다. K리그 경기 후 생방송 인터뷰에서 “서울이 감독 하나 바뀌었다고 명문팀이라니…. 그러다가 큰 코 다친다”고 했을 때는 ‘어떻게 저런 선수가 한국에서 태어났을까’라는 의문과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천수를 잠시 잊는 게 낫다. 대표팀을 위해서도, 이천수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과거 여자친구와의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있다. 이천수가 말디니의 머리통을 후려치던 그 때, A3챔피언스컵 대회에서 감기에 걸리고도 J리그 팀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콧물을 훌쩍이던 그 때, 월드컵에 나서 멋진 프리킥을 꽂아 넣던 그 때만 기억한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눈웃음은 여전히 기억나지만 허벅지의 셀룰라이트는 까먹은 셈이다. 이천수와의 기억은 좋은 추억만 잔뜩 포장돼 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히 현실을 바라볼 때다. 잠시 이천수를 잊어야 한다.

먼저 밝히자면 나도 이천수의 팬이다. 나는 항상 K리그의 발전과 흥행에 대해 역설하는데 이천수 만큼 이에 적극적인 선수도 못 봤다. 울산 시절에는 ‘K리그 보러 경기장으로 오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직접 ‘셀카’를 찍어 미니홈피에 올릴 정도로 K리그를 사랑하던 그였다. 골 넣고 티셔츠를 걷어 올리면 “K리그가 최고”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 실력으로도 그는 대단한 선수였다. 인천유나이티드의 K리그 우승 도전기를 그린 영화 ‘비상’에서 그는 인천의 우승 가능성에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린 악역(?)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는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만큼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이슈메이커이기도 했다.

이천수와 이근호, 당신이 감독이라면?
일부에서는 대표팀 선발에 관해 “이근호도 되는데 왜 이천수가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당연한 결과다. 얼마 전 나는 J리그 선수들이 대표팀 선발에 특혜 아닌 특혜를 받고 있는 건 아니냐는 칼럼을 썼었다. 그런데 J리그에서 보여주는 플레이를 따져 본다면 이천수는 이근호에게 한참 못 미친다. 이근호는 J리그에서는 괴물로 평가받는 공격수인 반면 이천수는 올 시즌 하위권 팀의 극히 평범한 공격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근호는 J리그에서는 ‘울랄라 세션’급이다.

이천수의 지금 기량은 대표팀은커녕 J리그에서도 돋보이는 수준이 아니다. 시즌 초반 잠시 반짝하긴 했지만 이후에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8월 말 허벅지 근육 파열로 6주의 재활을 요하는 부상까지 당했다. J리그에서 오미야가 최약체로 분류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부상 전에 보여준 모습은 과거의 이천수가 아니었다. 그의 센스는 여전하지만 스피드와 개인기, 체력 모두 전성기 수준이 아니다. 단지 센스로 이를 보완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이천수가 대표팀에 복귀하면 예전처럼 펄펄 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이천수가 소속된 오미야가 워낙 약체여서 그가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미야 정도 되는 약체팀이기 때문에 이천수가 그나마 선발 출전 기회를 얻었다고 보는 게 맞다. 올 시즌 전반기까지 세레소 오사카에서 임대로 뛰다가 연장 계약에 실패한 후 바스코 다 가마로 돌아갔다가 오미야의 부름을 받은 로드리고 핌파오가 그나마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 공격수들은 J리그에서도 가장 떨어지는 실력에 머물고 있다. 이천수 역시 같은 팀 공격수인 라파엘, 이시카와 나오키와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실력이 잘못 덮을 만큼 뛰어나야
이천수는 K리그에서 물의를 일으켜 대표팀 선발에 있어서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나중 문제다. 음주운전 뺑소니를 치거나 병역 문제를 일으켜 구속 수감됐던 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스포츠 무대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깟(?) 항명쯤이야 용서를 받아도 백 번은 받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실력이 잘못의 크기를 덮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나야 한다. 지금 이천수가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정작 중요한 건 J리그에서 연일 골 소식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천수의 대표팀 재입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

이동국 예를 드는 게 설득력이 좀 있을 것 같다. 이동국은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이미 조광래 감독의 눈에서 벗어난 선수였다. 조광래 감독의 전술적, 철학적으로 이동국은 거리가 멀었다.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와 젊은 선수를 선호하는 조광래 감독의 특성상 이동국은 상극이었다. 하지만 그는 K리그에서 믿기지 않는 플레이를 펼치면서 결국 대표팀에 입성했다. 조광래 감독이 뽑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여론이 조광래 감독을 압박했고 결국 조광래 감독은 이동국 카드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천수 역시 조광래 감독을 압박할 수 있는 건 경기력이다.

오미야에서 주전 정도 하는 걸로는 대표팀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김보경과 앞서 말한 이근호는 이미 J리그에서도 최상위급 선수로 통한다. J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선수를 무조건 대표팀에 넣는다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J리그에서 그저 그런 공격수를 대표팀에 뽑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천수가 대표팀에 다시 뽑히려면 오미야 주전 공격수를 넘어 J리그 정도는 ‘가볍게’ 정복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올 시즌에도 초반에만 잠시 활약했을 뿐 이후에는 보여준 게 없다. 23라운드에서 부상 당하기 전까지 23라운드 중 경고 누적으로 결장한 1경기를 제외한 22경기에서 4득점에 머물렀다.

쉽지 않은 복귀, 하지만 문은 열려있다
우리는 바보처럼 월드컵만 기억한다. 4년에 한 번 열릴 뿐인데 월드컵에서의 활약만을 가지고 선수를 평가한다. 월드컵과 월드컵 사이에 무수히 많은 리그 경기가 열리고 국제대회가 열린다. 그런데도 월드컵만 가지고 국제용과 국내용을 나눠 선수를 평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에서 보여줬던 이천수의 대단한 능력을 누가 모르나. 그 이후 시간은 많이 흘렀고 선수들의 기량에도 차이가 있는데 이런 걸 다 무시하고 과거의 추억, 특히 월드컵만을 떠올린다.

이렇게 따지면 2002년 월드컵에는 하석주가 나왔어야 했고 2006년 월드컵에서는 홍명보가 나왔어야 했다. 2010년 월드컵에도 조재진이 나왔어야 했다. 시간은 흐르는데 우리는 4년이고 8년이 지나도 그 선수의 기량은 그대로일 것이라 착각하는 중이다. 당돌한 20대 초반의 이천수도 이제는 세월이 흘러 기량이 점차 떨어지는 선수가 됐다. 그의 전성기 시절 활약을 추억하는 일은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월의 흐름을 넘어 아직도 그 때 그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이천수의 타고난 센스와 프리킥 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기성용이나 손흥민, 이청용, 박주영 등 그 사이에 대표팀 주전 자리를 꿰찬 이들의 성장 속도도 당연히 생각해야 한다. 이천수가 보여준 멋진 궤적의 프리킥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지만 그의 센스와 프리킥만 믿고 그를 다시 대표팀에 불러 들이기에는 지금 있는 대표팀 선수들의 실력이 워낙 좋다. 이천수는 다른 대표팀 공격수들이 유럽에서 맹활약하는 것에 비견될 플레이를 J리그에서 보여줘야 대표팀 재승선 여론 형성을 할까 말까다. 이천수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프지만 이건 현실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도 다시 이천수가 대표팀에 복귀해 명예를 회복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전성기 시절 만큼 부활해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가 남아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의 대표팀 복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잠시 대표팀에서 이천수를 잊는 건 어떨까. 그가 일본에서 연일 골 소식을 들려올 때까지는 그를 잠시 잊자. 그게 이천수의 부담감을 덜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대표팀 복귀를 항상 그리고 있다”는 이천수가 꿈을 이루려면 다시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좋은 기억만 떠올리며 과거를 추억할 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