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글날이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한글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게 된 하루였다. 그런데 세종대왕께서 살아계셨다면 아마 크게 화를 내셨을 것이 분명하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면서 상점 간판을 찾아보니 이거 한글로 된 간판 찾는 게 더 어려웠다. ‘미용실’보다는 ‘헤어숍’이 더 많았고 ‘빵집’보다는 ‘베이커리’가 더 많았다. 미용실 들렀다가 빵집 가는 건 구레나룻 남기지 않고 촌스러운 머리 자른 뒤 배고파서 부랴부랴 거지 마냥 빵쪼가리 씹는 것처럼 느껴지나. 반대로 헤어숍 들렀다가 베이커리 가는 건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로 변신한 뒤 트리트먼트까지하고 우아하게 바케트 빵을 종이 봉투에 담아가는 지적인 뉴요커처럼 느껴지나. 결국에는 다 똑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K리그, 이제는 바꿔야 할 이름
2년 전 이맘 때였다. K리그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언론이 먼저 만들어 낸 이 국적불명의 명칭은 결국 J리그의 아류라는 내용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출범한 한국 프로축구는 한 순간의 실수로 J리그의 아류가 됐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프로축구리그는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했다. 이 칼럼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일단 오늘 칼럼을 읽는데 앞서 2년 전 칼럼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 스스로 만든 굴욕의 이름 'K-리그' 칼럼 다시보기

이제는 바꿔야 할 시간이다. 더군다나 K리그는 내년부터 승강제의 첫 단추를 꿴다.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해 강등팀이 결정될 예정이다. K리그의 대대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새로 출범하는 기분으로 다시 출발대에 서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K리그라는 정체불명의 요상한 리그 명칭을 바꿀 시기를 놓치게 된다. 이제는 익숙한 K리그라는 명칭을 바꾸는 게 어색할 수도 있지만 큰 결단을 내려야 한다. 특히 한글날을 맞아 한 번 더 생각해 볼 시점이다.

2년 전 칼럼을 쓴 뒤 줄곧 K리그를 대체할 명칭을 생각해 봤다. 일부 팬들이 주장하는 미리내 리그도 좋고 승강제 도입에 맞춰 백두리그, 한라리그, 금강리그로 해도 나쁠 것이 없다. 그럴싸하게 KPL(코리안 프리미어리그)라도 하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경기를 본 뒤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너 어제 백두리그 봤어?”라고 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는 2년 동안 고민 끝에 가장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다른 의미 다 집어 치우고 ‘프로축구’로 하자.

그냥 ‘프로축구’로 하자
‘프로축구’라는 명칭은 그 자체로 상징이 될 수 있다. 프로야구도 그냥 프로야구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꼭 그럴싸한 명칭을 새로 가져다 붙일 이유가 없다. 1996년과 1997년에는 ‘라피도컵 프로축구대회’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쓰였는데 후원사 이름을 붙이고 뒤에 프로축구대회라고 쓰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상상해보자. 스포츠뉴스에서 “오늘 열린 프로축구 1부리그 경기에서는…”이라고 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미리내리그나 백두리그 등은 내가 말하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참 아름다운 순우리말 명칭이지만 축구와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우리도 유럽처럼 폼 나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프리미어리그나 세리에A라는 명칭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 줄 안다. 그런데 프리미어리그는 ‘최상위 리그’라는 의미고 세리에A는 ‘시리즈’의 이탈리아식 표현이 가미된 명칭일 뿐이다. 해석하자면 ‘첫 번째 시리즈’ 정도다. 분데스리가는 어떤가. 그냥 ‘연방 리그’라는 의미다. 리그앙도 ‘리그1’이다. 유럽 축구리그 명칭에 대단한 뜻이 포함된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들의 어감을 따라가려 한다. 대단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K리그를 프로축구로 바꾸고 ‘Korean Professional Football League’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외국 발음으로도 ‘프로축구’라고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우리는 이탈리아식 표현으로 ‘시리즈’를 ‘세리에’로, 프랑스식 표현으로 ‘리그원’을 ‘리그앙’으로 불러준다. 그렇다면 외국인도 그냥 K리그를 ‘프로축구’라고 불러주면 된다. 영어 공식 명칭은 ‘Pro Chukku’다. 혹시 외국인이 ‘Chukku’의 뜻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Football’의 한글 발음이 ‘축구’라고 하면 될 일이다. 왜 꼭 여기에 ‘코리안 프리미어리그’가 붙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프리미어리그’가 부러운가?
넘치는 상상일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한국 프로축구(Pro Chukku)가 발전해 아시아 전역에서 열풍을 일으킨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Chukku’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냥 이 발음이 무척 멋지고 훌륭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왜 우리는 축구를 ‘Chukku’라고 하지 못하고 ‘Footbal’l이라고 해야 하는지 무척 아쉽다”면서 자신들의 언어에 낙담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K리그 명칭을 ‘코리안 프리미어리그’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는데 한국 프로축구가 대단한 열풍을 일으킨다면 아시아권에서 ‘Football’이 ‘Chukku’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약간은 오버스러운 주장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결국 유럽축구의 그럴싸한 명칭도 다 그들의 친근한 언어라는 점이고 결국 우리는 그들을 동경해 명칭까지도 닮아가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우리도 프로축구의 가치가 높아지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단순한 ‘프로축구’라는 명칭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왜 꼭 남들을 따라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승강제가 실시되면 단순하게 ‘프로축구 1부리그’, ‘프로축구 2부리그’ 식으로 명칭을 구성하는 게 어떨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부리그’는 그냥 ‘1boo league’로 표기하자. 외국인이 ‘부’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갖는다면 “영어로 치면 Part의 개념”이라고 설명하면 된다. 이탈리아의 ‘세리에A’나 프랑스의 ‘리그앙’도 다 똑같은 의미다. 내후년에 개편될 K리그 최상위 리그의 명칭은 한글로는 ‘프로축구 1부리그’, 영어로는 ‘Pro Chukku 1boo league’가 가장 적당하다. 괜히 여기다가 무슨 프리미어리그니 뭐니 남들 다 가져다 쓰는 표현 쓰지 말자. 왜 자꾸 남들의 아류가 되려는가. 축구가 한자식 표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한글로 표기하고 발음하면서 쓰고 있는데 축구리그에 축구라는 명칭이 들어가지 않는 건 큰 오류다.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특히 그는 남들이 다 복잡한 제품을 떠올릴 때 단순한 디자인으로 어필했다. 덕지덕지 버튼이 달려있는 휴대폰에 대세인 시점에서 버튼이 딱 하나 뿐인 휴대폰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항상 “단순함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다. 단순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색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스티브 잡스는 보여줬다. 우리도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들만의 색을 갖자. 코리안 프리미어리그도 아니고 미리내 리그도 아니다. 언론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굴욕의 이름 K리그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프로축구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