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해외에서 뛰고 있는 한국 축구선수가 태극마크를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언론에서는 거칠게 그를 비난할 것이고 팬들 역시 “개인의 욕심과 나라를 맞바꾼 매국노”라고 인신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우리의 정서상 국가대표 차출 거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태극마크는 숭고한 것이라 영광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영광인 줄 알아 이것들아!”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한국 축구계에서 국가대표 차출 거부라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한국인은 아니지만 우리의 축구 무대인 K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들이 국가의 부름도 거절한 채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자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오늘은 국가의 부름을 거절한 K리그 사나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마케도니아 대신 수원 택한 스테보

수원은 지난 달 마케도니아 축구협회로부터 선수 차출 공문을 받았다. 유로2012 예선을 위해 수원 소속 공격수 스테보를 차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러시아와 아일랜드, 슬로바키아 등과 한 조에 편성된 마케도니아는 고란 판데프(나폴리) 외에 이렇다 할 공격수가 없어서 걱정이었다. A매치 15경기에 나선 스테보가 수원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본 마케도니아 축구협회는 러시아와의 원정 경기, 안도라와의 홈 경기를 앞두고 스테보를 대표팀으로 불러 들였다.

수원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소속 선수가 대표팀에 차출된 점은 기쁘지만 정규리그 도중 주축 공격수가 빠지게 돼 전력누수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유로2012 예선은 강제적 차출이 가능한 경기였기 때문에 수원은 스테보를 내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베르손과 마르셀 등 다른 외국인 공격수들이 부진을 거듭하며 이미 실패를 맛본 상황에서 혜성 같이 등장해 구세주 역할을 한 스테보가 빠진다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는 셈이었다.

하지만 스테보는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윤성효 감독을 찾아가 이런 말을 했다. “비행기로 왕복 이동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다. 다녀오면 컨디션에도 문제가 있다. 나에게는 수원이 우선이다.” 내심 스테보의 잔류를 바랐던 윤성효 감독은 그의 결정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윤성효 감독에게 대표팀 차출 거부 의사를 전한 스테보는 곧바로 마케도니아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러시아로 날아가지 않고 수원에 남아야겠습니다.”

결국 수원과 마케도니아 축구협회는 대화를 통해 스테보를 9월 A매치에는 차출하지 않고 10월에 열리는 아르메니아, 슬로바키아전에는 내보내는 것으로 합의를 마쳤다. 마케도니아 대표팀 차출을 포기하고 성남과의 2011 현대오일뱅크 K리그에 나선 스테보는 전반 14분 염기훈의 패스를 이어받아 오른발 슈팅으로 골을 기록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동료들과 부둥켜 안고 ‘마계대전’에서의 첫 골에 기뻐했다. 마치 유로2012 예선에서 골을 기록한 것처럼 말이다.

데얀이 차출 자제를 부탁한 이유

유로2012 예선에 참가하고 있는 몬테네그로도 FC서울 소속 데얀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잉글랜드에 이어 예선 G조에서 2위를 내달리고 있는 몬테네그로는 미르코 부치니치(유벤투스)와 스테판 요베티치(피오렌티나)가 좋은 움직임을 선보였지만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용할 선수가 부족했다. 라도미르 잘로비치(러시아 암카르 페름)와 안드리아 델리바시치(스페인 라요 바예카노)로 구성된 최전방은 파괴력이 부족했다.

당연히 몬테네그로는 데얀 차출을 준비했다. 이미 2008년에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이탈리아전을 통해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 데얀은 시간이 흐르고 더욱 성장해 이제 K리그 무대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우뚝 서 있었다. A매치에도 9경기에 나서 2골을 기록하며 위협적인 움직임을 선보인 데얀을 몬테네그로 축구협회가 가만둘 리 없었다. 데얀도 물론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몬테네그로 축구협회에 이렇게 말했다. “저의 대표팀 차출을 자제해 주세요. 저는 서울의 경기에 전념하고 싶어요.”

그 동안에도 데얀의 의견을 받아 들여 대표팀 차출을 자제했던 몬테네그로였지만 이번에는 강력했다. FC서울에 공문을 보내 데얀의 유로2012 예선 참가를 강력히 요청했다. 잉글랜드에 이어 예선 2위를 기록 중이지만 뒤쫓아오는 스위스와 불가리아, 웨일즈의 저항이 거세 더 위협적인 공격력을 위해서는 데얀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데얀은 대표팀 합류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지만 고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몬테네그로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지난 2일 벌어진 웨일즈와의 원정경기에서 후반 12분 라도미르 잘로비치와 교체돼 그라운드를 밟았다. 이미 스티브 모리슨(노르위치)과 아론 램지(아스널)에게 연거푸 골을 허용해 적지에서 0-2로 뒤진 몬테네그로로서는 총공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경기에 투입된 데얀은 14분 만인 후반 26분 스테판 요베티치에 결정적인 패스를 해 팀의 추격골을 도왔다. 비록 데얀의 어시스트에도 몬테네그로는 1-2로 패했지만 데얀이 그라운드에 투입돼 분위기를 바꿨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박지성, 대표팀에서 더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정서로는 충격적인 일이다. 그동안 태극마크가 선수 생활의 최종 목표라고 여기던 우리의 상황을 따져보면 스테보나 데얀은 역적에 가깝다. 아니 어떻게 국가의 성스럽고 숭고한 부름을 거절할 수가 있을까. 부상을 당하고도 이 사실을 숨긴 채 국가대표 경기에 나서는 게 애국이고 봉사라고 여겼던 우리로서는 스테보와 데얀의 선택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세계 축구의 흐름이 이렇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대표팀 차출 거부는 잘한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일도 아니다.

나는 우리가 대표팀 차출 문제를 애국심으로 바라보지 않고 보다 관대하게 생각했다면 박지성도 더 오랜 시간 대표팀에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중요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 부름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박지성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비중이 적은 한두 경기 정도는 차출을 거부하고 프리미어리그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면 박지성이 너무 이른 나이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지성에게 대표팀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만약 박지성이 대표팀 은퇴를 하지 않은 마당에서 “제가 이번 대표팀 경기는 쉬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가올 첼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면 “박지성이 뜨더니 참 거만해졌다”는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차라리 그로서는 이미 대표팀을 통해 희생할 만큼 했고 이런 대표팀 차출 논란 없이 그냥 깨끗하게 대표팀에서 은퇴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만약 박지성이 스테보나 데얀처럼 대표팀 차출 거부에 관대한 분위기였다면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건너뛰고 본선 나가면 열심히 할 생각이기 때문에…”라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너무 대표팀 차출을 애국심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었는지 되돌아보자. 만약 국가의 부름을 받은 선수가 “나는 소속팀에 충실하고 싶으니 명단에서 빼 달라”고 했다가는 아마 팬과 언론, 협회의 엄청난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이런 일도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다. 태극마크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기 보다는 그들의 선택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동국처럼 부상을 달고도 붕대를 칭칭 감은 채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게 애국인 시대는 지났다. 대표팀 만큼 클럽팀을 소중히 생각하는 선수들이 많아질수록 결국 대표팀도 강해지는 법이다.

고국 대신 택한 K리그, 그 위대한 가치

이제는 클럽 간의 대결 구도가 국가 간의 대결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왔다. 대표팀에서의 활약 이상으로 클럽팀의 활약에 더 애정을 갖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대표팀은 가끔 치르는 이벤트성 경기일 뿐 자신이 원래 설 자리는 클럽팀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시점이다. 자신에게 연봉을 주는 곳도 클럽팀이고 자신을 꾸준히 지지해 주는 팬들도 결국에는 클럽팀에 있다. 대표팀 발탁이야 늘 기분 좋은 일이지만 대표팀에서의 희생이 무조건적으로 강요될 필요는 없다. 대표팀은 그들에게 선택 사항일 뿐이다.

스테보와 데얀의 사례는 K리그의 위상이 이만큼 높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끝내 차출을 거부한 스테보나 고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차출 자제를 요청했다가 결국 대표팀에 합류한 데얀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것 이상으로 수원과 서울의 유니폼을 입는 것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유로2012에서 활약해 몸값을 높이고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지만 K리그 무대에서 자신의 팀이 더 좋은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도 대표팀 차출 이상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적어도 우리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이러한 선택을 했다.

우리는 잊고 있지만 외국인 선수들이 국가의 부름을 거절할 정도로 K리그가 가진 가치가 대단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들은 마케도니아 대신 수원을 택했고 몬테네그로 대신 서울을 택했다. 이거 참 흥미롭고 놀라운 일이다. K리그에서의 맹활약으로 일생일대의 꿈인 대표선수가 되는 사샤 같은 멋진 경우도 있지만 K리그에서의 우승이 국가대표팀의 선전보다 더 간절한 이들도 있다. 누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K리그를 국가대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외국인 선수가 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다. 스테보와 데얀은 많은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