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가장 싫어하던 형이 있었다. ‘나를 귀찮게 하는 저 형만 없으면 정말 웃으면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형은 나의 불만을 알았는지 며칠 뒤 이렇게 말했다. “군대에 가야해서 이제 일을 그만둬야겠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 형은 일주일이 지나고 웃으면서 다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병무청에 알아봤더니 지원자가 넘쳐서 6개월 있다가 다시 오래.” 결국 그 형과 나는 계속 함께 일을 해야 했다.

성남 팬이라면 만감이 교차하는 경기였을 것이다. 어제(27일) 벌어진 2011 하나은행 FA컵 8강 부산전에 대한 이야기다. 극적인 2-1 승리라는 경기 결과도 결과지만 이날 7개월을 기다린 한 선수는 20분 만에 구세주가 됐고 또 다른 한 선수는 지금까지 신뢰를 받다가 불과 며칠 만에 배신자가 됐다. ‘반가운 놈’ 라돈치치와 ‘미운 놈’ 사샤는 공교롭게도 어제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안 좋은 일도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이라는 걸 성남 팬들은 어제 느꼈을 것이다.

영웅에서 ‘미운 놈’ 된 사샤

사샤는 최근 이적 파문을 일으키며 성남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유럽 진출을 위해 성남 구단에서 많은 배려를 해줬지만 FC서울로 이적을 추진,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이번 이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샤는 팬들의 신뢰를 잃었다. 신태용 감독도 “다시는 사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불쾌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계약 기간 내내 경기에 내보내지 않고 벤치에 앉혀둘 수도 있다”고도 했다.

선수가 부족한 성남 상황상 사샤를 벤치에 앉혀둘 수는 없다. 그는 결국 다른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주장 완장을 차고 부산전에 나섰다. 하지만 지난해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기량으로 사랑을 받았던 사샤는 더 이상 없었다. 관중들은 사샤가 소개되자 야유를 보냈다. 믿었던 선수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기분이었다. 사샤는 이적 파문으로 팬을 잃은 셈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결정적인 실수로 페널티킥까지 내줬다. 결국 그가 내준 페널티킥은 부산의 골로 연결돼 자칫하면 사샤가 패배의 원흉이 될 수도 있었다. 사샤는 후반 들어 집중력을 발휘했지만 확실히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 경기장 안에서 사샤를 응원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사샤는 경기가 끝난 뒤 성남 선수들이 서포터스를 향해 인사를 할 때에도 혼자 라커룸으로 향했다. 팬들은 “인사도 하러 오지 않는 배신자”라고 했지만 아마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해도 “낯짝 두꺼운 녀석”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화려하게 돌아온 ‘반가운 놈’ 라돈치치

사샤의 이적 파문으로 선수 본인은 물론 성남 구단도 적지 않은 손해를 보게 됐다. 지난해 아시아 정복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사샤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구단으로서도 이미지에 손해를 입게 됐다. 팬들의 분노심이 커진 상태에서 사샤를 자랑스럽게 데리고 있기도, 그렇다고 사샤가 예전처럼 당당히 뛸 수 있기도 힘든 상황이다. 기회가 되면 거액을 제시하는 중동으로 파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졸지에 사샤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사샤가 며칠 사이 신뢰를 잃고 부산전에서 참담한 현실을 확인했다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라돈치치다.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7개월 동안 재활에만 매달렸던 그는 이날 경기에서 후반 중반 교체 투입됐다. 조동건과 교체돼 그라운드에 라돈치치가 모습을 드러내자 경기장의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이날 여러 차례 찬스를 날린 조동건이 빠져서 그런 건지 라돈치치가 들어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자라고 생각하련다. 어찌됐건 라돈치치는 이날 오랜 만에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가 팬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딱 20분이 필요했다. 라돈치치는 후반 종료 직전 극적인 역전골을 터뜨리며 팀의 2-1 승리를 확정지었다. 올 시즌 선수 부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성남으로서는 라돈치치의 화려한 복귀가 마냥 반가울 것이다. 더군다나 라돈치치는 골을 넣은 뒤 신태용 감독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고 신태용 감독도 아이처럼 좋아했다. 최근 언론을 통해 사샤에게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던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마치 나이트클럽 즉석만남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가 들어올 때와 아리따운 여성이 들어올 때의 표정이 확연히 다른 내 친구 김동혁의 모습과 비슷했다.

만감이 교차한 성남-부산전

그대로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라돈치치를 연호했다. 라돈치치는 여기 저기 손을 흔들며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구단은 라돈치치가 큰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올 초 재계약을 제시해 신뢰를 보냈다. 외국인 선수가 당장 몇 경기 뛰지 못하면 곧바로 방출해 버리는 K리그 무대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라돈치치 역시 고향에서 결혼한 뒤 재활에만 전념하며 복귀를 서둘렀다. 놀기 좋아하는 라돈치치지만 스스로 절제를 선택했고 재활 기간 동안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위해, 성남을 위해 절실히 준비했다.

성남은 사실상 정규리그 순위권 경쟁에서 밀려 있다. FA컵 우승이 아니면 내년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내기 힘든 상황이다. 만약 내년에 다시 아시아 무대에 도전할 수 있다면 모기업의 지원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올해와 같은 열악한 환경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팀을 FA컵 4강에 올려놓은 라돈치치의 한 방은 무척 소중했다. 신태용 감독도 경기가 끝난 뒤 “라돈치치가 잘해줬다. 후반기에 상당한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그의 복귀를 반겼다.

이날 경기에서 한 명은 영웅이 됐고 또 다른 한 명은 죄인이 됐다. 사샤의 이적 파문으로 분통을 터뜨렸던 성남 팬이라면 라돈치치의 복귀로 또 다른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경기다. 세상이라는 게 그렇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 나는 싫어하는 형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아 함께 일하면서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마음에 쏙 드는 여학생이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등장했고 결국 나는 그녀와 풋풋한 사랑을 나눴었다. 세상 일이라는 게 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나쁜 일만 주구장창 생기라는 법도 없다. 성남 팬의 심정이 지금 이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