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에게 발차기를 날렸던 거친 선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의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뤄낸 감독? 이길 팀과도 비기고 질 팀과도 비기는 무승부 축구의 황제? 아마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허정무가 유럽의 높은 벽을 실감하던 1980년대 초, 네덜란드에서 맹활약했던 유럽파의 원조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차범근의 유럽 무대 활약은 알아도 허정무의 활약상은 잘 모르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잊고 있는 ‘유럽파 축구선수’ 허정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뒤늦게 축구를 시작한 소년 허정무

허정무는 1953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넷째로 교장선생님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운동 신경은 타고 났지만 체계적으로 축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목포중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운명적으로 축구를 맞이하게 됐다. 친구들과 함께 진도군 체육대회에 면 대표로 출전하게 된 그는 1960년대 국가대표를 지냈던 삼촌 허윤정 선생의 눈에 들어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됐다. 그렇게 그는 늦은 나이에 트레이닝복 한 벌과 운동화, 이불 한 개 들고 축구를 위해 서울 중동중학교로 옮겼다.

당시 허정무는 키가 150c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체격이었다.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운 적이 없어서 기본기도 형편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선배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담아뒀다가 혼자 새벽에 운동장으로 나가 그걸 그대로 따라했다. 혼자 가로등 밑에서 볼 트래핑을 연습했고 벽에 슈팅을 날리기를 3개월, 그는 놀라운 발전 속도를 보이며 주전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중동중학교에서 영등포공고로 팀을 옮긴 유판순 감독을 따라 영등포공고로 진학했다. 허정무는 영등포공고에서 2학년 한 해 동안 전국대회 7차례 결승전 진출, 3회 우승이라는 전설을 써 내려갔다.

그렇게 그는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영무, 조영증, 신현호, 박창선 등과 함께 청소년대표로 선발됐다.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국가대표에까지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때부터 ‘연세대의 허정무’, ‘고려대의 차범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남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한 허정무는 미련하게 노력한 결과 축구를 시작한지 6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그의 주민등록상 출생년도는 1955년이지만 이는 그가 중학교 시절 뒤늦게 축구에 입문해 나이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허정무는 1953년에 태어났다.

유럽 구단의 표적이 되다

1978년 허정무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국내에는 프로축구가 생기기 전이었고 그는 한국전력에 입단하며 실업 무대 문턱을 밟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군대 문제가 걸려 있었다. 26세의 나이로 아직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는 한국전력에 입단하자마자 곧바로 군 입대를 자원했다. 그것도 가장 힘들다는 해병대였다. 모두들 허정무의 선택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1978년 6월 군에 입대해 1980년 6월까지 해병대 축구단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그러면서 국가대표로 숱한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당대 최고의 선수 차범근은 1978년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능력을 인정받아 1979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한 차범근으로 인해 유럽 축구계에서는 아시아권 선수들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할 때였다. 다음 표적은 당연히 허정무였다. 군 복무가 1년이나 남은 1979년부터 유럽 구단에서 직접적인 영입 제의가 봇물을 이뤘다. 허정무 본인 역시 “차범근 선배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면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유럽 진출 협상이 시작됐다.

지금처럼 에이전트가 있지도 않아 현지 교민들이 자기 일처럼 나서 중간에서 일을 도왔다. 특히 서독 광부로 갔다가 현지에서 성공한 한 교민이 에이전트 역할을 했다. 서독 아르메니아 빌레벨트를 비롯해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등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냈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인 구단은 분데스리가 빌레벨트였다. 빌레벨트 측에서는 초청장과 비행기 티켓을 보내 허정무를 직접 테스트해보고 싶어했다. 차범근의 성공으로 ‘허정무 역시 분데스리가로 진출하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주를 이뤘다.

결혼 5일 만에 혼자 유럽으로

당시 허정무는 깜짝 결혼 발표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대 최고의 MC 최미나 씨와의 결혼 소식은 미남 축구스타와 연예인의 만남으로 이슈가 됐다. 허정무는 유럽 진출을 앞두고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1980년 7월 18일, 이 둘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후 1시에 결혼식을 올린 뒤 허정무가 곧바로 오후 7시에 열리는 대표팀 경기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유럽 진출을 앞두고 대표팀 고별 경기 형식으로 치러진 포르투갈 프로팀 보아비스타와의 경기에 허정무가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국 준비로 분주한 허정무는 아내와의 첫날밤을 보내지도 못했다. 허정무가 “도고 온천에 가서 하루 정도 묵고 오자”고 했지만 오히려 최미나 씨는 “무리하게 스케줄을 잡다가는 자칫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며 극구 반대해 신혼여행도 미룬 채 유럽 진출을 준비했다. 한국전력은 군 복무를 마친 뒤 유럽 진출을 타진하고 있는 허정무를 위해 파격적인 조건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다. 곧바로 유럽으로 날아갈 경우 금전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어 군 제대 후 복직을 받아들인 뒤 자진 퇴사 형식을 갖춰 허정무에게 한국전력 근무 3년치 분의 퇴직금을 안겨줬다. 허정무는 3년 동안 군 복무와 대표 생활로 한국전력 소속으로 국내 경기에 단 한 번 출장한 게 전부였다.

그렇게 그는 유럽으로 날아갔다. 결혼한 지 5일 된 신부를 혼자 남겨두고 떠났다. 한국전력의 배려로 이적료가 없던 터라 계약에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그런데 서독에 도착하니 빌레벨트 구단이 아닌 보쿰 관계자가 공항에 나와 있었다. 중간에 허정무를 빼돌리려는 심산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허정무는 보쿰 관계자를 따라 훈련장으로 향했고 간단한 연습 경기에 임했다. 연습 경기를 마치자마자 보쿰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장 계약합시다. 후한 대우를 약속하겠소. 다른 구단에서 우리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우리와 또 한 번 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허정무는 가계약을 마친 뒤 빌레벨트를 들렀다가 네덜란드로 떠났다.

파격적인 대우로 PSV 입단

PSV로 날아간 허정무는 이 곳에서도 단 한 차례의 연습 경기를 가진 뒤 곧바로 영입 제의를 받았다. PSV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연봉 1억 2천만 원과 별도의 수당을 지급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최고급 자동차를 전액 지원하겠으며 2층 집도 제공하겠습니다. 한국인 통역은 물론 은퇴 후 필립스사의 계장급 직책까지 보장합니다.” 허정무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PSV와 곧바로 계약을 맺었다. 당시 한국의 필립스사에서는 국내에 전면광고를 내보내며 허정무의 PSV 진출에 열광하는 등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당시 강남 은마아파트 31평 한 채 가격이 1,800만원 정도였으니 허정무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PSV는 신인 선수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네덜란드 대표 선수만 7명이나 포진해 있어 주전 경쟁도 쉽지 않았다. 허정무도 입단하자마자 쉽지 않은 경쟁을 펼쳐야 했다. 훈련을 하면서 한 순간 한 순간이 경쟁의 연속이었다. 프리시즌 벨기에에서 열린 3개국 초청 친선축구 안더레흐트전에 첫 선을 보인 허정무는 이날 경기에서 입단 테스트 중에 다친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경기에 출전해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얼굴도 모르는 선수의 투혼에 동료들이 감탄을 보낸 것이다. 허정무는 이 경기에서 후반 10분을 남기고 페널티킥을 얻어내 팀의 2-2 무승부에 기여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리그 개막전에서 후반 교체 출장해 12분을 뛰며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PSV 선수들은 허정무의 희생적인 플레이에 놀라워했다. 외국인 선수라면 어떻게든 튀고 싶어 독단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게 다반사였지만 허정무는 골 욕심을 내지 않고 조직력을 중시하는 플레이로 동료들의 믿음을 샀다. 2라운드에서 15분, 3라운드에서 20분간 활약한 그는 서서히 유럽 무대에 적응했다. 그리고 1980년 9월 3일 NEC브레다와의 4라운드 홈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해 맹활약을 펼쳤다. 한국에서는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섰지만 PSV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 임무를 부여 받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 “후, 후, 후”

90분간 쉴 새 없이 그라운드를 누빈 허정무의 플레이에 네덜란드 언론은 10점 만점 중 9점을 부여하며 리그 베스트11으로 선정했다. 네덜란드 국영TV에서는 허정무를 밀착 취재해 저녁 황금 시간대에 8분 짜리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고 한 신문에서는 두 페이지에 걸쳐 허정무 특집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당시 모든 연예 활동을 접고 남편 내조를 위해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날아온 최미나 씨는 네덜란드인들에게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개하기 위해 침실을 한국식으로 꾸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날아온 미남 축구 선수와 그의 아리따운 아내, 그리고 그들의 생활 방식에 주목하며 한국을 알아갔다.

이후 허정무는 승승장구했다. 5차례 선발 출장해 두 번이나 베스트11에 선정되는 등 팀의 듬직한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했다. 팬들은 허정무가 공을 잡을 때면 그의 성인 허(Huh)를 ‘후’로 발음하며 “후, 후, 후, 후”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PSV 홈경기에서는 이러한 장관이 매번 연출됐다. 허정무가 선발 출장하기 전 11위까지 떨어졌던 팀은 11월 들어 3연승하며 4위까지 뛰어 올랐다. 그들은 허정무의 악착같은 플레이에 감탄했다. 차범근이나 변병주처럼 빠른 발은 갖지 못했지만 지능적인 동작으로 상대 수비를 돌파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허정무의 장점은 많은 활동량과 근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멀티 플레이어적인 능력이었다. 지금이야 멀티 플레이어가 수두룩하지만 당시에는 국내에서 이렇게 한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가 드물었다. 네덜란드에서도 허정무의 이러한 장점을 높게 평가했다. 허정무는 공격수 출신이지만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는 부상으로 빠진 오른쪽 풀백 김호곤을 대신해 그 자리에서 뛰며 진가를 입증했다. 이후 주로 대표팀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섰지만 PSV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맹활약했다. 어느 포지션에서건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하는 허정무는 감독과 팬들이 모두 좋아하는 선수였다. 1982년 트벤테전에서는 수비수 3명을 제치고 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을 UEFA컵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진돗개에게 물린 네덜란드 축구 영웅

PSV 팬들은 여전히 허정무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와의 세 차례 맞대결 때문이다. 허정무가 PSV에서 인정받고 있던 1982년, 크루이프는 타국 생활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며 발롱도르를 세 차례나 수상하고 고향팀인 아약스로 돌아온 크루이프로 인해 네덜란드는 들썩였다. 영웅의 마지막 축구 인생을 지켜보려는 이들로 술렁이던 때였다. 하지만 크루이프의 화려한 마지막을 방해하는 선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허정무였다.

1982년 PSV는 아약스 원정을 떠났다. 네덜란드 리그 양대 산맥의 경기에서 크루이프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모두가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으로 나선 허정무는 쉽게 그를 놔두지 않았다. 집요한 몸싸움과 과감한 태클로 전반 내내 크루이프를 꽁꽁 묶었다. 후반을 앞두고 허정무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후반 시작을 앞두고 크루이프는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릎을 다쳤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PSV는 적지에서 아약스와 무승부를 거두고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현지 언론에서는 “크루이프가 ‘융무 후’에게 겁을 먹고 내뺐다”고 전했다. ‘융무 후’는 허정무의 네덜란드식 발음이었다.

PSV 팬들은 ‘전설’ 크루이프를 꺾은 허정무를 연호했다. 그리고 이듬해 초 PSV와 아약스가 컵대회 준결승 1차전에서 만났다. 이번에도 아약스의 홈이었다. 허정무는 지난 번 맞대결처럼 크루이프를 압도했다. 크루이프는 허정무의 거친 플레이에 말려들었고 전반 30분경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허정무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왼쪽 눈을 강타당한 허정무는 그라운드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했지만 주심은 크루이프에게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PSV 팬들은 “심판은 겁쟁이다. 국민 영웅인 크루이프에게 레드 카드를 내밀 수 있는 심판은 없다”며 조롱했다. 결국 허정무는 부상으로 교체되고 말았고 PSV는 0-2로 패했다.

PSV, 아직도 선명한 허정무의 추억

보름 뒤 이번에는 PSV 안방에서 준결승 2차전이 열렸다. PSV 팬들은 ‘네덜란드 국민 영웅’ 크루이프에 거센 야유를 보냈다. 그들은 오로지 PSV를 위해 뛰는 허정무를 응원했다. 유대인인 크루이프를 조롱하면서 경기장에 이스라엘 국기와 함께 “크루이프를 죽이라”는 걸개까지 걸었다. 대형 사고가 터질 것을 우려한 양 팀 감독은 암묵적으로 합의를 했다. 허정무와 크루이프 모두 자신의 팀 왼쪽 미드필더로 나서게 한 것이다. 경기 내내 충돌하지 않도록 일부러 떼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허정무는 전반 시작 15분 만에 크루이프에게 달려가 거친 플레이로 그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결국 PSV는 연장전까지 간 끝에 3-1로 승리, 통합 스코어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허정무는 승부차기에서 결정적인 실축을 범했고 팀의 패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크루이프와의 맞대결도 끝났다. 28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PSV 팬들은 당시 크루이프를 꽁꽁 묶은 허정무의 활약을 기억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박지성이 PSV에 진출하자 많은 팬들은 “아약스와의 경기 때 크루이프를 완벽히 묶었던 ‘융무 후’처럼 박지성도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공격수 반 니스텔로이 역시 “어릴 적 ‘융무 후’는 내 축구 우상 중 한 명이었다. 크루이프를 못살게 굴던 그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내게 아주 인상 깊었던 선수였다”고 회상한 적도 있다.

허정무는 PSV 측으로부터 3년 재계약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이 제안을 거절했다. 고국이 그리웠고 아내가 한국행을 강력히 원했다. 또한 부모님들도 아들이 타지에서 고생하기보다는 한국에서 남은 선수 생활을 이어가길 바랐다. PSV에서는 3년 재계약 대신 2년 재계약으로 제안을 바꿨고 이후 네덜란드 시민권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결국 허정무는 아내와 부모님의 뜻을 존중했다. 당시 국내 프로축구가 출범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시기도 괜찮았다. 그렇게 허정무는 네덜란드에서 세 시즌 동안 77경기에 나서 15골을 넣은 활약을 펼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서면서 15골이나 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허정무의 재능과 오해, 그리고 업적

허정무는 멀티 플레이어가 뭔지 보여준 선수였다. 허정무는 1986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때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지만 정작 본선 무대에서는 왼쪽 윙백으로 출전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또한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 진출을 이끈 것도 허정무의 발이었다. 그는 1985년 중요한 일본과의 최종 예선 홈 2차전에서 부상을 딛고 출전해 골을 기록하며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마라도나를 상대로 한 거친 플레이로 터프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는 앞서 말한 크루이프와의 세 번째 대결 전까지 네덜란드 리그에서 단 한 차례도 경고를 받지 않은 선수였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많은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 진출해 맹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성공한 선수는 없었다. 황선홍과 김주성의 분데스리가 도전도 결국에는 실패로 끝났고 포르투갈에 진출한 정재권과 네덜란드의 노정윤, 프랑스에 갔던 서정원과 이상윤도 그리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1980년 초반에 이렇게 엄청난 활약을 한 선수가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럽 소식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터라 우리가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유럽파 축구선수’ 허정무의 업적은 대단했다. 비록 차범근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허정무 역시 위대한 선수임에는 틀림없다.